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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역사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국 역사에 분명하게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현재 기록상 512년(신라 지증왕 13) 하슬라주(溟州)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于山國) 정벌부터이다.
울릉도와 독도 및 주변해역을 무대로 해상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신라가 우산국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은 본토의 찬란했던 불교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울릉도·독도 등 해양도서민들과 본토민들의 활발한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안 일대의 도서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국 역사에 분명하게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영토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여진족과 왜구의 침범

울릉도·독도지역은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우리의 강역내에 존재하였다.고려 태조 13년(930), 후삼국의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가자 우산국은 왕건에게 래조(來朝)와 함께 방물(方物)을 바쳤다. 고려가 새로운 통일왕조로 등장한 후 고려 중앙정부로부터 우산국(于山國) 혹은 우릉성(羽陵城)으로 불리면서, 고려의 동해안 외곽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며 본토와 지속적인 문물교류를 통해 번성해 갔다.
의종 11년(1157)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김유립(金柔立)의 우릉성 조사보고에서 당시에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석불(石佛)·철종(鐵鍾)·석탑(石塔)' 등이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11세기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이 지역이 황폐화하기 이전까지는 본토의 수준높은 불교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산국은 대체로 고려전기 현종대 이후 급격히 황폐화 되었으며, 그 결정적인 요인은 여진족의 침입이었다.우산국이 여진족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은 것은 현종 9년경으로 추측된다. 고려는 즉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냈으며, 다음 해(현종 10년, 1019)에는 여진족 침입 당시 본토로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산국의 피폐상황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던 듯 하며, 이에 현종 13년(1022)에는 본토에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예주(禮州-지금의 영해지역)에 정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고려사』에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덕종 원년(1032) "우릉성주가 아들 부어잉다랑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羽陵城主 遣子夫於仍多郞 來獻土物)"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우산국의 피폐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 후 본토로의 이주는 계속되었던 듯 하며, 이후 우산국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여진족의 침입이후 약 100여년이 지난 인종 19년(1141)에는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의종 11년(1157)에는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金柔立)이 울릉도에 주민 이주와 관부설치가 가능한 지를 조사하였다. 그 후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계속된 국내외 정세의 불안과 1231년(고종 18)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공으로 인해 옛 우산국 혹은 우릉성지역에 대한 개발은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장기간에 걸친 몽고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있던 고종 30년(1243), 울릉도에 동해안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주가 실시된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대몽항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육지의 주민들을 산성(山城) 혹은 해도(海島)로 이주시킨, 중앙정부의 산성·해도 입보책(山城海島入保策)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다음으로 불력(佛力)을 빌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 중 피란 수도 강화경(江華京)에서 혼신의 열정으로 판각되었던 강화경판고려대장경(江華京板高麗大藏經, 일명 八萬大藏經)의 재목(材木)을 구하기 위한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풍파로 인한 익사자가 많이 발생함으로써 이주정책은 결국 철폐되고 말았지만, 이 시기에 울릉도로 이주한 사람은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몽고와의 강화 이후 원의 대목(大木)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려정부는 울릉도에서 벌목을 행하였다. 대규모로 이루어진 벌목으로 현지민들의 고초가 심했으며, 이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본토로 도망했으리라 생각된다.

원간섭기 동안에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지배는 계속되었다. 『고려사』에는 충목왕 2년(1326) "동계의 우릉도인이 래조(來朝)하였다 (東界芋陵島人來朝)"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동계(東界)란 오늘날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원으로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이었으며, 우릉도(芋陵島)는 울릉도의 다른 명칭이었다. 독도가 고래로 울릉도의 속도(屬島)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이 지역은 고려의 통치지역 중 하나였으며, 지속적인 본토와의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가 몽고의 지배를 벗어난 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은 어려웠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충정왕 2년(1350)부터 본격화되어 고려말까지 계속된 왜구의 창궐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사』에는 우왕 5년(1379) 7월 "왜가 무릉도에 보름동안 머물다가 물러갔다(倭入武陵島 留半月而去)"라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문헌상 우왕대의 기록만 보이지만 왜구의 이 지역에 대한 침구는 충정왕대부터 고려말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며, 주민의 거주를 어렵게 하였을 것이다.

결국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개발은 신왕조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려말 왜구의 침구와 이 지역의 피폐는 조선시대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주민의 이주보다는 섬을 비우는 수토정책을 택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려일대를 통해 울릉도·독도지역은 고려의 영토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고려시대에 작성된 자료들은 후대에 전승되어, 조선초 『고려사』 지리지를 편찬할 때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명기할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이 지역에 대한 정책입안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수토정책

조선시대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은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여 섬을 비우는 수토정책(搜討政策)으로, 태종조부터 고종조까지 지속되었다. 한국사에서 주민의 이주정책은 흔히 찾아볼 수 있으며, 수토정책 역시 이러한 이주정책의 하나였다.

조선초기에는 여진족의 위협이 사라졌고, 고려후기 이래 집중된 왜구의 침구도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으므로 동해안 외곽 방어선으로서의 울릉도의 기능은 훨씬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태종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방제도의 정비와, 국초부터 정력적으로 추진된 동북·서북면의 개척과 사민정책 등은 당시 국력의 집중을 요하는 것으로, 울릉도 및 독도에 대한 적극적인 경략과 재건은 보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국초부터 추진된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정비방향은 모든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는 동시에 고을의 통·폐합을 통하여 그 수를 줄여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왕조는 굳이 울릉도에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전쟁수행, 지역개발 등에 주민 이주정책을 적절히 사용해 왔던 역사적 경험은, 조선 태종조에 많은 토론을 거쳐 울릉도에 대해 '주민의 철수와 정기적인 수토'를 택하게 했던 것이다.

한편 수토정책은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것과 함께 정기적인 순찰을 병행하는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부담은 계속 남는 것이었다. 때문에 섬을 비우기보다는 관부를 설치하고 주민을 이주·정착시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논란이 계속되기도 하였다.위와 같은 중앙정부의 거주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본토의 民들은 끊임없이 울릉도와 독도에 내왕하며 어로·채취작업을 하였으며,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여 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울릉도 등지에 대한 정기적인 순찰을 통해, 토산물 등의 현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거주민들이 발견되는 즉시 본토로 송환시켰다.수토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태종조 부터 대마도주의 울릉도 거주 청원이 있었으나, "이국인이 국경을 넘나들 경우 분쟁의 소지가 발생한다" 하여 번번히 기각되었다.이러한 수토정책이 철회된 것은 1882년(고종 19)이었으며, 1883년 김옥균이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되면서 울릉도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주민이주가 시작되었다.

삼봉도

일본은 현재 우리의 옛기록에 나타나는 삼봉도(三峯島)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독도가 삼봉도로 불렸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많다.

삼봉도

우선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삼봉도의 형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한다"고 되어 있다. 다음으로, 일본의 『전보신문(電報新聞)』 1906년 5월 27일자 기사에는 러일해전의 전장(戰場)으로 독도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지형을 설명하면서 동도와 서도 그리고 관음도(觀音島)라 하여 세개의 섬을 열거하였다. 또한 이 신문에 실린 독도의 전경 사진에는 세개의 섬 즉, '삼봉도'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제3국의 자료를 살펴보자. 1849년 3월 독도를 목격한 미국 포경선 '윌리암 톰슨'호는 그 항해일지에 "세개의 바위를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즉, 독도의 모습을 '삼봉도'로 파악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독도가 삼봉도였음은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제3국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의 진실성은 오늘날 해상에서 독도를 관망해 보면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 독도를 보기 어려운 경우에도 독도가 '삼봉'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진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한국기록에 나타나는 삼봉도는 울릉도에 불과하다"는 일본의 주장이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우리의 기록이 구체적이고 정확했다는 것도 함께 알 수 있다.

안용복의 활약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의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혹은 의죽도(磯竹島·이소다케시마)로 독도를 송도(松島)라 부르면서, 울릉도·독도등지에서 고기를 잡거나 나무를 도벌하기 시작했다.
이에 1613년(광해 6) 조선조정에서는 대마도주에게 공문을 보내 일본인의 울릉도 등지에 대한 왕래를 금하게 하였다. 그러나 1618년(광해 10)에는 호키슈(伯耆州) 요나고(米子)의 상인 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가문이 에도의 도꾸가와막부(江戶 德川幕府)로부터 정식 면허(竹島渡海免許)를 받는 등 일본인의 울릉도·독도에 대한 침구f는 계속되었다.

한편 정부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어부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어장인 울릉도·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은 종종 충돌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1693년(숙종 19)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을 중심으로 한 동래·울산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오야 가문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1699년(숙종 25)까지 약 6년간에 걸쳐 두 나라간 울릉도·독도 영유권에 대해 외교문서가 오가는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논쟁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마치 별개의 섬인양 하여, 울릉도 점령의 근거를 얻어내려 한 대마도주의 계략을 사서(史書)와 안용복의 증언 등을 통하여 간파한 조선조정의 강력한 대응으로 "이후 다시는 울릉도 등지에 왕래하지 않겠다"는 일본 막부의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사건의 과정과 결과가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17세기 말엽에 양국 최고 통치기구에서 공식적으로,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이며 두 섬이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는 것과, 독도가 우리의 땅이라는 것은 당시 일반 백성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조정에서 일본에 보내어진 서계에는 한결같이 '울릉도와 독도가 지금은 비워져 있지만 옛부터 내려온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고, 1차 충돌 후 납치되어 간 안용복의 당당한 항의에, 에도 막부에서는 면밀한 검토 끝에 '울릉도(竹島)와 우산도(于山島-松島 : 독도)는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를 써 주었다.
2차 충돌시 일본인들은"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 당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竹島, 독도를 松島라 칭하였다)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말에, 안용복은"송도는 자산도(子山島: 당시 조선에서는 독도를 于山島로 칭하였는데 '于'자가 '子'·'干'·'千'자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라는 대답에서 당시 독도가 우리의 땅이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은 안용복 사건이 울릉도에 국한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위와 같은 점을 볼 때, 이 사건은 그 자체로 이미 17세기 말엽에 독도의 영유권논쟁이 종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이 사건이 종결된 이후 그 결과가 양국간 영토의식과 그 경계 획정에 끼친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울릉도·독도 등지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였다. 지금까지의 안일한 태도를 버리고, 2년마다 한번씩 정기적인 순찰을 행하게 되었다. 사정에 따라 격년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평균 5년내에 1회씩의 순찰은 한말 울릉군수가 파견될 때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의 결과로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일본의 서쪽 경계를 오끼섬 까지로 한계짓게 되었다. 1696년 호끼주(伯耆州) 태수가 작성한 {이소다께시마각서(磯竹島覺書)}와 1785년 하야시(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1881년 기따자와(北澤正誠)가 작성한 {竹島考證}·{竹島版圖所屬考} 등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일본측 자료들이다.

시마네헌고시 40호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은 러시아함대를 감시하기 위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 본토와 연결된 전선망을 설치하는 동시에 망루를 세웠다.
일본군부는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일본 정부에서는 1905년 1월 28일 각의결정 후, 같은 해 2월 22일 '시마네현(島根縣) 고시 40호'를 통해 독도를 일방적으로 일본영토에 편입시켰다.
위 고시 40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끼도와의 거리는 서북 85리에 달하는 도서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오끼도사(隱崎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
이 불법 편입사실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통감정치가 확립된 후인 1906년 음력 3월 5일에야 대한제국에 알려졌다.

이 고시는 현재 일본에 의해 독도의 편입이 '무주지선점론(無主地先占論)'에 입각하여,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영토편입이라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즉, "독도는 1905년 당시 주인없는 땅(無主地)이었으므로 일본이 [무주지(無主地)를 선점(先占)할 경우 영토획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국제법상 요건을 충족시켜 시마네현(도근현)에 편입시킨 합법적인 일본의 영토"라는 것이다. 독도가 강제편입되어 있었던 시마네현에는 지금도 "다케시마(竹島)를 회복하자"는 내용의 입간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고시는 법적효력이 전혀 없는 것이며, 그 자체가 고시로 존재하지 않은 회람(回覽)에 불과한 것이었다.

첫째, 독도는 당시 주인없는 땅(無主地)이 아니었다.
독도는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로 울릉도에 군수를 파견할 때, 이미 그 관할 구역(石島:당시에 널리 불려지던 '돌섬'의 한자식 표기)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 군부가 독도에 대한 불법 영토편입을 추진하면서 표면에 내세운 일본 어업가 中井養三郞의 '리앙꼬島領土編入 貸下願'은 원래 중정양삼랑이 독도근해의 독점어업권을 대한제국으로부터 빌리기 위해서 일본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것인데, 당시 농상무성 수산국장과 해군성 수로부장의 공작에 의해서 대하원(貸下願)에 '리앙꼬島 영토편입'이 추가되어, 대한제국정부가 아니라 일본정부에 청원된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 내무성은 러일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독도를 편입시키는 것은, '한국정부의 저항'으로 쉽지 않을 것이며, 열강에게 '일본이 한국병탄의 야심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갖게할 위험이 있다고 영토편입을 반대하였다.
즉, 당시 영토편입 당사자인 일본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독도의 영토편입은 국제법상으로 불법적인 것이었다.

둘째, 선점(先占)의 경우, 무주지역을 자국의 영역에 편입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공표하게 되어있는데, 일본은 그러한 절차를 편법으로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편입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일본은 다른 도서(島嶼)의 경우 자국의 영토로 편입할 때 각의(閣議)를 거쳐 해당 관공서와 신문에 고시해온 관행(慣行)과 달리 유독 독도의 경우 소위 [시마네현고시 40호]는 당시 일본의 104개 신문 중 어디에도 고시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의 관보(官報)에 조차도 1905년 6월 5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시에 명시된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현재 이 고시의 원본은 유일하게 시마네현청에 단 1장 보관되어 있는데, 이 문건은 1905년 2월 22일 당시 시마네현에서 발간됐던 [시마네현령(島根縣令)]이나 [시마네현훈령(島根縣訓令)] 어디에도 수록돼 있지 않다. 더구나 이 문건에는 회람(回覽)이라는 주인(朱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이로써 일본이 내세우는 [시마네현고시 40호]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고시가 아니라 관계자 몇몇이 돌려본 '회람(回覽)'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 일본의 합법성 주장과는 달리 당시 독도 영토편입이라는 것은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했던 명백한 침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도는 러일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정에서 불법 침탈되었으며, 독도의 침탈은 한반도 침탈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억지와는 반대로 [시마네현 고시 40호]는 오히려 역사의 진실을 밝혀 주는 자료가 될 뿐이다.

일제의 수로지

일본해군이 발행한 {수로지(水路誌)}는 정부의 공식 간행물로 공신력이 높다. 그런데, 광복이전 일본의 수로지에는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한국의 영토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도박물관에는 1945년 8월 광복이전의 일본 수로지로 ①{환영수로지( 瀛水路誌)}(1883년판·1886년판), ②{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1894년판·1899년판·1907년판), ③{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1911년판·1920년판), ④{조선연안수로지(朝鮮沿岸水路誌}(1933년판), ⑤{조선연안간이수로지(朝鮮沿岸簡易水路誌)}(1945년판)가 전시되어 있다.

위 수로지 ①에는 독도관련 내용이 '[リヤンコ-ルト]列岩'이라는 제목으로 [조선국일반정세(朝鮮國一般政勢)]의 항목에 들어있다. ②의 {조선수로지} 1894년판(255∼256쪽)과, 1899년판(263쪽)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있다.1905년 [시마네현고시 40호]이후 발간된 {조선수로지} 제2개판에는 명칭이 '竹島(Liancourt rock)'로 바뀌어 있는데, […한국인은 이를 獨島라 쓰고, 일본어부는 리양꼬島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이외 위 수로지들은 광복직전인 1945년 6월에 발간된 ⑤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내용으로 일관되게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원래 조선의 영토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일본 수로지의 내용은 광복이후 발간된 1952년판 {조선남동안수로지(朝鮮南東岸水路誌)}에서 부터 변화된다. 더 이상 한국을 지배할 수 없게 된 일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독도를 울릉도와는 별개의 섬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이상과 같은 일본 수로지의 내용을 통해서 광복직전까지 일본은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음을 알고 있었으며, 현재 일본의 독도영유권의 주장이 교활한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할 수 있다.

미국포경선의 항해일지

독도를 최초로 발견한 서양배는 과연 프랑스의 포경선 Liancourt일까?
지금까지는, 1849년 1월 27일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끌'이 독도를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당시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독도는 소위 '리앙꼬르岩'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그런데, Liancourt號보다 9개월 정도 앞선 1848년 4월 17일 미국의 포경선 Cherokee號가 독도를 발견하였다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다.

즉, Cherokee호 선장 제이콥 L.클리브랜드의 항해일지 4월 16일자에 의하면 終盤에 two small islands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개의 작은 섬 그것은 바로 독도이다. 당시 포경선들이 사용하고 있던 海圖에는 독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체로키호는 4월 17일 오전 4시에서 12시 사이에 독도를 발견하였다. 이는 독도발견에 관한 서양최초의 기록이 된다. 이후, 고래잡이를 위해 동해를 찾은 미국의 포경선들은 당시 해도에 실려있지 않은 섬, 독도를 발견하게 된다. 19세기 서양인의 눈에 독도는 어떠한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Moctezuma호는 1849년 3월 2일, 3일 9일 울릉도와 함께 pinnacle rock을 보았다고 항해일지에 적고 있다. 독도의 정상이 뾰족하기에 pinnacle rock 즉 첨탑岩이라 불렀을 것이다.

Moctezuma호는 1849년 3월 2일, 3일 9일 울릉도와 함께 pinnacle rock을 보았다고 항해일지에 적고 있다. 독도의 정상이 뾰족하기에 pinnacle rock 즉 첨탑岩이라 불렀을 것이다. 또, 3월 18일 William Thompson호는 울릉도 동남쪽 40마일쯤에 어떤 해도에도 없는 3 Rocks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세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독도를 보았던 것이다. 이는 성종대에 독도를 三峰島로 불렀던 우리의 기록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Cambria호는 1849년 4월 28일에 울릉도를, 29일에는 海圖에 실려있지 않은 the small islands를 보았다고 적고 있다. 더욱이, 이 일기에는 울릉도와 독도의 그림까지 그려두고 있다. 이는 종래 알려져 있던 프랑스의 해군함정 콩스탄틴호가 1856년 그린 독도그림이나 러시아의 군함 팔라스호가 1857년 그린 독도그림 보다 7∼8년 앞서는 최초의 독도그림이 될 것이다.
Henry Kneeland호는 1853년 4월 18일 울릉도와 seal rock을 보았으며, seal rock에 상륙하여 물개 7마리를 잡았다고 쓰고 있다. seal rock 즉 물개바위는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독도에서 잡았다는 seal(물개)은 강치(海驢)일 것이다. 이 강치를 물개로 오인한 것이었다.

Florida호는 1857년 3월 27일 Dagelet Rock(울릉岩)을 보았다고 하며, 4월 3일에는 울릉도는 뒤쪽에 울릉岩은 앞쪽에 있었다고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4월 7일에는 울릉도와 울릉岩의 중간쯤에 배가 있었는데, 모두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Dagelet Rock(울릉암)은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이 기록은 독도가 울릉도(Dagelet Island)의 子島 혹은 屬島임을 시사한다. 즉, 새로이 발견한 독도를 Dagelet Rock이라 이름지음으로서, 플러리다號는 독도를 울릉도(Dagelet Island)의 屬島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860년 4월 11일 Florida호는 울릉도를 보았으며, Asses Ears라 불리는 바위를 지났다고 한다. 여기서 the rocks called Asses Ears(당나귀의 귀라 불리는 바위)는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동도와 서도로 솟아있는 형상이 마치 나귀의 두 귀처럼 보였기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또한 문맥상에서 보아 이전에도 그렇게 불렀던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항해일지는 독도가 울릉도와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영토임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물이 될 것이며, 서양최초의 독도발견이 리앙꼬르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인식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광복과 독도의 회복

1945년 광복과 함께, 독도는 한반도 부속도서로서 우리에게 반환되었다.
2차대전이 종전된 후 연합국은 1945년 9월 27일 미 5함대 사령관의 '각서 80호'로 일본의 어로제한선을 설정하여 통지하였는데 이를 '맥아더 라인'이라 한다. 이 선에 따르면 독도는 한국령에 귀속되어 있다.
1946년 1월 29일 일본정부에 하달된 연합군 최고사령관 훈령 677호(SCAPIN No 677) 3항에는 추축국 일본의 영역에서 제외되는 지역을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제주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竹島)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6년 6월 22일의 훈령 1033호에는 "일본의 선박과 선원은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해서는 안되며, 이 섬에 대한 여하한 접근도 금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은 전 세계가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한 우리 정부의 행정 및 군사력이 독도에 미칠 수 없는 공백을 틈타 독도에 다시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1952년 1월 18일 우리 정부는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일명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을 발포하여 독도가 우리의 영토이며, 그 주변 12해리가 우리의 영해임을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동월 28일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반박 구상서를 우리 정부에 보내 옴으로써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은 다시 불붙게 되었다.

독도의용수비대

독도의용수비대

한국전쟁 중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할 때 일본은 다시 독도에 불법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1953년에서 56년에 걸쳐 독도에서 일본의 불법 점령을 막아낸 것은 울릉도 출신 민간인들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었다.
의용수비대원들은 1953년 4월 독도에 입도한 후, 1956년 12월 25일 경북경찰청 울릉경찰서에 독도수비 임무와 장비 일체를 인계하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갈 때까지, 자금과 무기를 자체적으로 조달하면서, 약 3년 8개월간 수차에 걸쳐 계속된 일본의 영토침범을 격퇴하였다.

숭고한 애국심으로 갖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면서 독도를 사수했던 의용수비대의 활약이 없었다면,한국전쟁 중에 독도는 다시 일본에 점령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독도의용수비대

1956년 12월 해산당시 독도의용수비대의 조직과 명단은 다음과 같다.
수비대장 홍순칠, 부대장 황영문, 제1전대장 서기종, 대원 김재두·최부업·조상달·김용근·하자진·김현수·이형우·김장호·양봉준, 제2전대장 정원도, 대원 김영복·김수봉·이상국·이규현·김경호·허신도·김영호, 후방지원대장 김병렬, 대원 정재덕·한상룡·박영희, 교육대장 유원식, 대원 오일환·고성달, 보급주임 김인갑, 보좌 구용복, 보급선장 정이권, 기관장 안학율, 갑판장 이필영·정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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