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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

주제 선정 이유는 한국의 문헌과 지도는 512년 이후 한국의 영토로 기록이 되어 있고,
또한 일본에서도 공식문서로 일본땅이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세계에서도 카이로 선언 포츠당 선언 등등 일본은 폭력으로 빼앗은 지역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합국최고서령관각서에서도 제677호로 지정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에서 독도를 우리나라 영토를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세종실록을 보면 독도와 울릉도가 강원도 울질현에 속한 두 섬이라고 자세히 표시가 되어있고,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 때 신라에 복속한 우산국의 영토라고 기록되어 있고, 17세기 말 일본 정부에서는 독도와 울릉도가 우리나라 영토라고 재확인을 했기 때문에 선정했습니다.
본론: 역사적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팔도 총도 1530년에 만들어진 지도에서도 역시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표시 되어 있고, 그 당시 이름인 ‘우산도’ 로 그려져 있다고 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고문헌과 일본 고지도에서 독도를 우리나라 영토로 표시했고, 19세기 메이지 정부 공문서에서 독도와 울릉도가 우리나라 영토라고 표기했고, 또한 19세기말 대한제국 정부에서 독도와 울릉도가 우리나라 영토라고 정확히 표기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러·일 전쟁 와중에 일본의 입장변화, ‘독도 강제 침탈’로 인해 1856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 의해 제기된 이후,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 이른바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이 틈만 나면 주창한 한국병탄 계획이 러ㆍ일 전쟁을 계기로 본격화하게 됩니다. 일본은 러ㆍ일전쟁 도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 영토를 병참기지로 이용할 근거를 마련해 두고 같은 해 9월과 11월 군함 니타카호와 쓰시마호를 각각 파견하여 독도에 망루 건설 가능성 조사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겨울철의 험악한 날씨와 작전 수행의 어려움 등으로 독도 망루 건설은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러일전쟁이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강제 편입을 전격 단행했었습니다. 그동안 부정적이었던 독도관련 청원을 승인하는 형식으로 독도를 ‘竹島’라고 명명하고 시마네현 소속으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또한 일본은 전쟁을 위해 독도를 강제로 편입했습니다. 그래서 러ㆍ일전쟁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으로 대러선전포고 원문을 기초한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는 ‘독도를 한국의 영토인 줄 알고’ 임대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찾아온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에게 “이 시국이야말로 독도의 영토편입이 필요하다.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면 적함을 감시하는 데 극히 좋지 않겠는가?”라고 발언했습니다. 한편 1905년 5월 28일 인도양을 돌아온 러시아 발트함대가 울릉도를 최후 결전의 장소로 택한 일본 함대에 대패하여 결국 독도 근처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해전에서의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절감하게 된 일본은 같은 해 8월 서둘러 독도망루를 준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국의 중재로 그해 10월 15일 예상보다 빨리 종전되자 독도망루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10월 24일 철거되었습니다. 하지만, 독도는 당시 일본의 언론에 큼직한 사진과 함께 전승기념 명소로까지 소개되었습니다. 일본은 종전 직후 곧바로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항거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일신협약에 이은 한·일병합조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탈사를 마무리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1905년 일본 내각의 독도편입 결정은 일본의 한반도 침탈을 위한 서곡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침탈야욕이 되살아나 제 2차 세계대전 후 독도는 연합국총사령부 명령 등에 의해 일본의 관할대상에서 명시적으로 제외되었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다른 모든 섬들과 함께 한반도 부속도서로서 대한민국에 반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은 집요하게 다시 시작됩니다. 1947년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홍보책자를 발간하여 미 국무부의 참고자료로 활용하도록 하는 한편, 윌리암 시볼드라는 친일인사를 통해서 대일강화조약에서 독도를 일본의 여토로 규정하려는 로비를 적극적으로 펼쳤으나 다른 연합국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새롭게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들고나와 이를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독도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 가능한 법적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에서 비롯된 역사문제이기 때문에 재판소에서 다툴 대상도 아닙니다. 여기서 ‘안용복’ 장군과 ‘홍순칠’ 대장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17세기 말의 일본 독도 찬탈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영토 논쟁이 벌어졌다. 일본의 주장은 독도뿐만 아니라 울릉도, 그 주변 해역은 모두 일본의 영토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시 어부였던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만난 일본 어부들을 문책하고, 몸소 도일하여 울릉도의 위치를 근거로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장을 받아낸 영웅입니다 .이런 안용복의 용감한 투쟁은 안타깝게도 일제의 식민지 찬탈과 민족의 비운 6.25를 맞으며 잊혀졌습니다. 그로인해 독도는 일제에 거의 강탈하다시피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며 독도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내겠다고 다짐한 울릉도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제2의 안용복이자 독도 의용 수비대의 대장 ‘홍순칠’입니다. 홍순칠은 사비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대장이 되어 독도로 건너갔습니다. 그후 세 차례의 일본 경비정 침입을 멋지게 막아내고 일본의 배를 나포하여 독도가 한국의 땅임을 가르치는 등 정정당당하고 용감히 독도를 지켜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영웅들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영토 논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용복 장군은 비천한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애국심으로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용감한 도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안용복이 독도에 대한 소식을 전하자 여러 차례 일본 막부로 서찰을 보내 독도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나, 얼마 안가 곧 일인들이 독도에 들어와서 다케시마라고 명명할 때까지 조선 조정은 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며 어떠한 이득도 없는 어려운 길을 택한 홍순칠 대장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일본이 강화조약을 날조하여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할 때까지 알지 못했던 정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도의 영토 분쟁은 일본의 비열한 역사 왜곡은 물론, 한국인의 무관심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느낀 점은 독도의 대해 조사하면서 비로써 독도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일본은 젊은 우익단체까지 “독도는 우리 땅”을 외치며 반환 문제를 이야기하고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고 지키겠다는 광적인 단체의 움직임까지
보입니다. 우리는 일본 속국의 있었으면서도 끝까지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독도에 대한 홍보를 외국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독도가 한국의 땅임을 더욱 더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하고 충분한 자료를 모아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독도가 우리 땅임을 계속 홍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나라의 힘을 키우는 노력이 동반되며 국민들 모두 독도 지킴이가 되어 단기적인 관심이 아닌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독도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 라고 하면 대답하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독도에 대해 바르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면 과학기술,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등 모든 면에서 일본을 따라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의 힘을 모아 다시 한번 한강의 기적에 도전해야 합니다.
이에 앞장 설 사람은 나를 비롯한 우리의 청소년들입니다.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일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나와 세계적으로 국력이 일본을 앞서는 것이 독도를 지키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출처]네이버, [출처]국립해양조사원